비제이 싱, 피지에서 PGA 무대로
골프의 정상을 향한 비제이 싱의 여정
231224 썬데이 골퍼 스토리 -23-
유년 시절과 골프와의 인연
비제이 싱의 이야기는 피지의 작은 섬에서 시작된다. 그는 1963년, 골프에 대한 어떠한 경험이나 지식도 없는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항공기 정비사였지만, 그는 피지에서 가장 유명한 골프 코스 중 하나에서 골프공을 줍는 일을 하며 골프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각종 지역 대회와 작은 투어에 참여하여 기본기를 다지고 골프 경력을 쌓는다. 이는 그가 1982년 국제 무대로 나아가는 밑거름이자 발판이 되었다.
아시아 투어의 시련
1984년 말레이시아 PGA 챔피언십에서의 우승은 비제이 싱에게 큰 기쁨과 성취감을 안겨주었다. 하지만 그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1985년, 그는 스코어카드 조작 혐의로 아시아 골프 서킷에서 출전 정지 처분을 받았다. 이는 그의 골프 커리어에 있어 심각한 타격이었으며, 그의 성장에 중대한 장애물로 작용했다.
당시 제기된 혐의는, 그가 자신의 점수를 1오버에서 1언더로 조작했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 싱은 강력히 부인했으며 그는 어떤 경우에도 출전 금지가 아닌 단순한 실격 처리가 적절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아시아 PGA 투어의 회장인 존 벤더는 싱에게 아시아 PGA 투어에서의 평생 출전 금지라는 엄격한 처분을 내렸다.
이 사건은 싱의 초기 경력을 쌓는 데 있어 중대한 장애가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싱은 자신의 꿈을 향한 여정을 포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 사건은 그의 투지와 열정을 강화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훗날 그가 세계적인 골퍼로 성장하는 데 중요한 성장 동력이 되었다.
유럽 투어에서의 성공
아시아 투어에서의 시련을 뒤로한체, 싱 은 유럽 투어로의 진출을 목표로 삼았다. 그는 자신의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필요한 자금을 저축하고, 1988년 나이지리아 오픈에 참가하기로 결정했다. 이 대회에서 그는 현지 관중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으며, 자신의 재능을 다시 한번 빛냈다.
그해 말, 그는 유럽 투어 퀄리파잉 스쿨에 입학하여 유럽 투어로의 전환을 본격화했다. 유럽 투어에서의 첫 해인 1989년, 그는 이탈리아 볼보 오픈 챔피언십에서 첫 번째 유럽 투어 타이틀을 획득하며 화려하게 데뷔했고, 이 기간 동안 볼보 오픈 디 피렌체, 아이보리 코스트 오픈, 나이지리아 오픈, 그리고 짐바브웨 오픈에서도 우승하며 놀라운 성과를 이어갔다.
또한 The Open Championship에서도 공동 23위를 기록하며 자신의 실력을 국제적으로 입증했다. 그는 1990년에 유럽 투어에서 다시 우승을 거두었고, 1992년에는 두 번의 우승을 추가하여 자신의 명성을 굳건히 다졌다.
PGA투어에서의 성공가도
1993년 PGA 투어 멤버십을 획득한 그는 1993년 Buick Classic에서의 승리로 화려하게 시작되었다. 이 승리로 그는 올해의 신인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안았다. 그러나 곧이어 부상의 고난을 겪으며 시험에 직면했다. 1994년 허리와 목 문제로 인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그는 1995년 뷰익 클래식과 피닉스 오픈에서 강력하게 복귀하며 자신의 본능과 투지를 수많은 관중들 앞에서 입증했다.
1998년에는 워싱턴의 사할리 컨트리 클럽에서 열린 PGA 챔피언십에서 그의 첫 메이저 타이틀을 획득하며 골프 역사에 자신의 이름을 새겼다. 이 우승은 단지 시작에 불과했다. 2000년 마스터스에서 Ernie Els를 꺾고 또 다른 메이저 타이틀을 추가하며 자신의 위상을 높였다. 2001년에는 우승은 없었지만 투어 베스트 14에 진입하며 꾸준한 성과를 보였고, 2002년 Shell Houston Open에서 새로운 토너먼트 72홀 득점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2003년은 싱 에게 특별한 해였다. 그는 4개의 토너먼트에서 우승하고 18번의 상위 10위 안에 들며 $7,573,907의 상금으로 PGA 투어 상금 선두에 올랐다. 그리고 이듬해에 AT&T Pebble Beach National Pro-Am에서 우승하고 PGA 챔피언십에서 그의 세 번째 메이저 타이틀을 획득했다. 이 승리로 그는 타이거 우즈를 제치고 세계 랭킹 1위에 올랐으며, PGA 투어와 PGA of America의 올해의 선수로 선정되었다.
그러나 이후 그의 경력은 부상으로 인한 어려움과 함께 고난의 시기를 겪었다. 2008년 플레이오프 이후 허리 부상으로 인해 경기에 참가하지 못했다. 그는 과열된 PGA 경쟁에서 오는 압박, 부상과 회복, 그리고 승리와 패배를 통해 자신의 내면적인 힘과 끈기를 드러내며 서서히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강력하고 정확한 샷 능력과 멘탈
그의 강력한 드라이버 샷은 그의 장점에서 큰 비중을 차지 했다.
그는 PGA 투어에서의 평균 드라이버 거리 300야드를 훌쩍 넘겼고, 이는 당시로서는 매우 뛰어난 기록이었다. 또한 정확한 아이언 샷을 가지고 있어서 버디 찬스를 가장 많이 획득한 선수로도 기록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위기 상황에서도 매우 강했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침착함을 유지하고 좋은 샷을 하기로 유명했으며, 이는 그가 많은 대회에서 우승할 수 있었던 중요한 요인 중 하나였다.
또한 투어에서 가장 열심히 연습하는 선수 중 한 명으로도 유명하다. 초기 경력에는 쇼트 게임과 퍼팅에서 다소 약점을 보였으나, 그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 부분을 크게 개선했다.
그의 연습에 대한 헌신은 그의 기술을 지속적으로 개선하는 데 크게 기여했고, 그의 경력을 통틀어 일관된 성과를 내는 데 도움이 되었다.
기타 언론에 비춰진 그의 이미지
2003년, 비제이 싱은 Bank of America Colonial 대회 전에 논란의 중심에 섰다. 이 대회에는 여성 골퍼 아니카 소렌스탐이 출전할 예정이었고, 싱은 “그녀가 컷을 통과하지 못하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그녀는 여기에 속하지 않기 때문이다” 라고 말했다고 일부 언론이 그의 말을 인용하여 보도했다.
하지만 나중에 싱 은 자신의 인터뷰를 통해 소렌스탐이 다른 고군분투하는 남성 선수의 자리를 차지할 것이라는 점에 대한 우려섞인 감정을 표현한 것 뿐이라며 일축했다. 그러나 언론은 이 발언에 집중했고, 골프 다이제스트는 싱 이 “프로 골프계에서 나쁜 남자의 표본” 되었다고 써서 다시한번 논란을 증폭시켰다.
2005년 5월, 싱은 피지의 친선대사로 임명되었다. 그는 자신의 나라를 대표하기 위해 피지 정부로부터 어떠한 대가도 기대하지 않는다고 말하며, 2005년 5월 18일 기자회견에서 싱은 피지 내 인종 관계의 악화에 대해 언급했다. 싱은 이렇게 작은 나라에서는 모든 인종의 사람들이 함께 살고, 서로의 차이점을 인정하고 존중하며 삶을 이어가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에디터 써니 캐디